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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dlands

idlemoon 2011. 4. 5. 01:34

작년에 출간된 <Bloodlands: Europe Between Hitler and Stalin>이란 책의 서평에서 발췌.
책의 저자는 Timothy Snyder. 서평(Haper's 2월호)의 저자는 Adam Hochschild. 여기서
'Bloodlands'는 지금의 폴란드, 벨로루시(Belarus), 우크라이나, 발틱 3국, 그리고 러시아의
한 좁은 부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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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의 전투에 의한 희생을 제외하고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대량 살상에 대해 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소련의 공개재판,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 피는 연기. 그러나
이 두 질문에 대답해보라: 그 잔혹했던 20년 동안, 어느 나라가 국민의 절반이 죽임을 당하
거나 추방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310만 명이나 - 아우슈비츠 화장터의
불꽃이 꺼져갈 무렵에도 - 총살되거나 고의적인 굶겨 죽임을 당했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벨로루시이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치에게 잡혀있던 소련 포로들이다
- 이들은 철조망 울타리 안에 하도 빽빽히 수용되어 있어서 오직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나이더의 주의 깊은 계산에 따르면 그 기간에 'Bloodlands' 지역에서의 희생자는 최소
1400만에 달한다: 전쟁포로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대부분, 소련의 집단농장체제로 인한
기근으로 사망한 330만의 우크라이나인들, 나치 점령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 히틀러나
스탈린의 미움을 받은 여러 민족들...

1930-40년대의 유럽을 이야기할 때 왜 미국인들은 그 지역을 무시하는가? 내 생각에 그건
우리가 어떤 것들을 통해 그 시기에 대해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먼저, <일기>로 유명한 독일 유태인 안네 프랑크가 있다. 수많은 10대들이 그 일기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간다면 이탈리아 유태인인 쁘리모 레비 같은 작가들이
있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미국인의 관심을 받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작가는 거의
항상 서유럽 출신이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의 희생자에 대한 이미지도 특정 문학작품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우린
아서 케슬러의 <Darkness at Noon>의 주인공이나 솔제니친 같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런 이미지가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심각하게 불완전할 뿐이다. 서유럽의 유태인들이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건 사실이지만 전체 유태인 희생자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 숙청 당한 시인이나 정치가들이 분명 있지만 그 숫자는 굶어죽은
우크라이나인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이 역사에 대해 그토록 무지한가? 언어와 인종이 복잡하고 국경이 계속 바뀌는
동유럽에 비해 서유럽은 미국인들에게 분명 훨씬 편하고 익숙한 곳이다. 우리는 이름없는
우크라이나 농부보다 자성적(自省的)이고 몬테소리 교육을 받은 중산층의 안네 프랑크에게
더 쉽게 공감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 'Bloodlands'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종종 분명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피해자며
가해자였다. 나치가 엄청나게 많은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들을 죽였지만...
그들 사회에는 또한 강력한 반유태 정서가 있었다... 다수의 국민들이 유태인 학살에 적극
동참했다... 우리 미국인들은 역사적 인물을 영웅과 악한으로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동유럽에선 종종 그런 구분이 힘들다.

미국인의 또다른 경향은 - 이건 미국만의 것이 아닐 테다 - 항상 적절한 도덕적 선택을 하는
자신을 상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이 가능한 시대와 장소를 선호
한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때때로 그런 것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비시 정권하의
프랑스에 살고 있었고 유태인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선택 가능한 것들이 있었다. 정보원으로
나치에 협력할 수도 있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레지스땅스가 될 수도 있었으며, 그냥 숨죽여
조용히 지낼 수도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독일에 잡힌 미군이나 영국군 포로들은 영웅적
탈출시도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냥 얌전히 지내며 (대체로)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도덕적 갈림길로부터 수많은 영화와 연극과 소설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 사이의 덫에 걸린 사람들 앞에 놓여졌던 선택은
릭의 카페(<카사블랑카>에 나오는 카페)에서 피아노 음악 위로 논의되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암울했다...

전쟁이 계속되고 독일이 노동력 충원을 필요로 함에 따라, 독일 수용소의 소련군 포로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확실하게 굶어죽거나 최소한의 식량을 얻는 대신 독일을 위해
일하거나. 후자는 흔히 죽음의 수용소에서 일하는 걸 의미했다. 이런 것은 <카사블랑카>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http://www.nybooks.com/articles/archives/2010/nov/11/worst-madness/?pagination=fa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