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감정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산업화가 촉진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맞는 말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니라 해도 논의를 위해 그렇다고 가정하자. 그랬을 때 일본의 식민 지배가 정당화되는가?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너희들이 2등 시민으로 사는 데 동의한다면 아주 잘살게 해주겠다"고 제의한다면 받아들일 사람/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 아베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해서 나라의 주권을 잃는다든지 하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내 말은 자존심과 실리를 항상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의 원수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어하지 않는 - 상당한 경제적 피해를 입는다 해도 - 사람에게 우리는 뭐라고 하기 어렵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는 말들을 하지만, 자존심은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생존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금의 반일감정의 표출은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이유가 뭘까?
1.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다. 언제까지 그때 일로 민족적 자존심을 찾을 건가.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영화는 봤어도 할아버지 할머니 원수를 갚겠다는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는 본 기억이 없다. 현재의 '자존심'은 머리에서, 이념에서, 나온 면이 크다. 내가 어렸을 때의 반일감정은 다르다. 주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난 물론 해방 후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은 일제를 경험했었고 다들 일본 사람을 '일본놈'이라고 불렀다.
2. 잃는 실리가 너무 크다. 아베가 경고한 대로 보복이 실행된다면 실제로 그럴 것 같다. 문재인은 거북선 12척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3. 우리가 (강제징용 판결을) 잘못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게 핵심이다. 자존심을 찾지 말아야 하는 건 그 감정이 고리타분해서도 아니고, 경제전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도 아니다. 일본의 반응이 (나름)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게 부당하다면 나라도 오래 잊었던 반일감정을 드러낼 것이다. 지금의 일본의 행동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사실, 내가 아베라도 빡칠 것 같다. 기존 협정에 해석의 여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문재인 정부가) 일방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상황이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정부는 반일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부추기고 있다. 국내 정치 상황이 불리할 때 외부의 적을 만드는 건 (혹은 이미 적이었다면 비난을 가열차게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권자들이 보이는 행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