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idlemoon 2010. 5. 25. 02:11

이창동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뛰어나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2시간 20분가량
되지만 길이에 비해 지루하지 않았다. 작은 디테일들이 잘 살아있고, 단역들의 연기도 좋다.
뭐랄까, 각 장면들이 '뻔하지' 않았다. 꼼꼼하게 연출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재미있었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겠다. 나야 워낙 까다로우니까 그렇다
쳐도, 주위의 관객들이 웃거나 반응하는 소리를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감동을 받았느냐는
질문에도 긍정적인 답을 못하겠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시(에 관련된) 시퀀스가 손자(에 관련된) 시퀀스와 너무 따로
논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둘의 관련성이 드러나지만 너무 관념적이다. 이 스토리를
영화가 아니라 글 - 단편소설 같은 - 형태로 접했으면 아마 괜찮았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좀 더 감각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윤정희의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연기를 못했다는 말을 전혀 할 수 없음에도 그렇다.
간병인을 하면서 겨우 살아가는 할머니가 시를 배운다? 뭐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위에 "관념적"이란 말도 했듯이, 살아있는 하나의 인간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감독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일 뿐인 캐릭터로 더 다가온다.

결말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손자가 잡혀가는데, 누가 고발을 했다는 의미일 테다. 누가
그랬나? 죽은 소녀의 어머니는 아닌 것 같고.. 전혀 복선 같은 게 없다 (있었는데 내가 못
봤나?). 그리고 양미자(윤정희)는 왜 사라졌나?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데, 내 생각에 자살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데다, 손자의 행실이 드러나게 된 걸 비관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여전히 손자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책임감이 있을 것이고, 알츠하이머병
혹은 그런 류의 판정을 받았다고 자살하는 건 지식인 층에나 드물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열린 결말이란 A도 개연성이 있고 B도 개연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개연성이 낮은 걸 '열린 결말'로 카무플라주한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