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주

idlemoon 2009. 11. 14. 09:50

시나리오로는 꽤 가능성이 있어 보였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저예산이라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긴 했겠지만, 연출이나 연기 많이 부족하다. 사람들이 가끔 웃었는데, 정말 재미가
있어서였는지 허무해서였는지 모르겠다.

스토리도 문제가 없지 않다. 가장 걸리는 부분은, 가스 호스를 가위로 찌른 우연과 언니에게
사고가 생긴 우연이 겹친다는 것이다. 가스가 샌다고 항상 폭발하는 게 아니다. 가스가 새면
보통 냄새로 알게 된다. 집을 나온 날과 일치하는 것도 작위적이다.

더 큰 문제는 사건에 '의도성'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가위를 뒤에 숨기고 뒷걸음치다가 어디
걸려 넘어지면서 누군가를 찔러 죽게 했다고 하자. 이건 우연이 하나라는 점에서 더 단순하고
그래서 덜 작위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사건에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나. 운전부주의로
사람을 죽게 했다면 평생 괴로움을 느끼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언니를 미워했고, 진심은 아니지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 있어야 "얘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옛날에 본 일본 영화 <유레루>가 생각난다. 다리 위에서 형이 살의로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에 영화가 깊이가 있어지는 것이다. <파주>의 은모는 성인이 아니라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잠재적 의도성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뭐, 감독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순전한 우연들이 만들어내는 비극들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던 건지도.

더 이상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광화문 큐브에서 봤다. 일반 극장엔 다 내려서 그런지 거의
꽉 찼다. <유레루>도 거기서 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