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제(P): 가상화폐는 내재가치가 없다.
이 주장에 대해 일반 화폐도 내재가치가 없는 건 마찬가지라는 반박을 자주 듣는다. 일반 화폐(지폐)가 그 자체로는 종이조각에 불과하니까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반박은 요점을 벗어났다. 화폐의 (교환)가치는 합의에 의해 정해진다. 가령 "물 한 통의 가격을 1,000원으로 하자"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화폐 자체에 가격이란 없다. 굳이 말하자면 1,000원 지폐의 가격은 그냥 1,000원이다. (서로 다른 화폐를 사용하는 집단 사이에서는 물론 상대방 화폐의 가격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합의를 한 집단 내에서 화폐의 가격이란 의미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코인은 일반 상품처럼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정해진다. 사려는 사람이 많으면 가격이 오른다. 그런데 그 수요가 일반 상품과 달리 내적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그래서 위 명제(P)가 나온 것이다. 위 명제는 디지털코인에 내재가치가 없는데도 사람들이 사려고 몰려드는 걸 지적한 것이다. 일반 화폐는 사람들이 사려고 몰려들지 않는다.
명제 P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생략된 부분을 명시적으도 드러내면 대략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Full P: 가상화폐는 내재가치가 없다. 따라서 위험하다, 투자하지 않는 게 좋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반박하려면 그 반박문은 대략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일반 화폐도 내재가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투자한다. 따라서 가상화폐에 투자해도 된다." 여기서 중간 부분이 문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일반 화폐는 가격이란 게 없다. 그건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외화는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한국 내에서 한화에 '투자'하는 사람은 없다.
반박자들의 실제 머릿속 생각은 다음에 가까울 것이다: "일반 화폐도 내재가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원한다. 따라서 가상화폐를 원해도 된다." 그러나 원하는 것과 투자하는 건 다르다. 내가 사과를 좋아하고 원하지만 그게 사과에 투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까지 "일반 돈도 내재가치가 없는 건 마찬가지"라는 반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가 했다. 그러나 이건 P를 반박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따지고 보니 내재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날 수도 있고, 위험하다는 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정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어려운 논의를 할 생각은 없고 능력도 없다. 다만 지금 당장 둘 중 하나에 돈을 걸어야 한다면 난 투자 대상으로서 디지털코인의 미래는 회의적이라는 데 걸겠다. 현재의 광풍은 블록체인 기술이 자리를 잡는 초기의 현상일 뿐이라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