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부조리'로 번역을 하는데, '부조리'는 국립국어원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남. 또는 그런 일.
2. ‘부정행위01’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3. 『철학』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 (이하 생략)
이 중 3번이 absurdism이다. 그런데 absurdism이 absurd에서 파생된 단어이듯
3번 의미의 부조리는 1( & 2)의 부조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absurd'가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남"과 같은 것인가? 딱히
틀렸다고 하기 힘들겠지만, 조금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영어사전을 보면 'absurd'의 의미 중에 '모순'이 있다. A와 B가 모순이라면, 둘 다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는 서로 공존할 순 없지만 어느 한 쪽에
무게가 있지는 않다.
그런데 어떤 X가 Y라는 원칙(이치)에 맞지 않을 때는 그 둘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
모순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도, "X가 Y에 모순된다"라고 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Y가 X에 모순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absurdism은 이런 의미의 모순보다는 앞서 말한 모순과 더 가까운 것 같다.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인간과 무관심한 우주는 서로 모순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금 복잡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요지는 실존철학 같은 데서 말하는 absurd 를
'부조리'로 번역하는 게 조금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까뮈의 말을 인용하자면(불어를 모르니 영어로),
The absurd is born out of this confrontation between the human need and the
unreasonable silence of the world. (The absurd는 인간의 욕구/필요와 세계의
알 수 없는 침묵 사이의 이러한 대립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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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것 같네요..ㅜㅜ
"Y라는 원칙(이치)"이란 표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Y라는 원칙"은 문제가
없지만 "Y라는 이치"? 말이 되나?
어쨌든 모순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중의 하나라고 해야겠다. 장사꾼이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고요,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
한다면 그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치'는 이런 논리적인 것 외에 자연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
으로 보인다. 국어사전(국립국어원)에 보면 "자연의 이치",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같은 예가 나와 있다.
마찬가지로 '부조리'도 "말에 조리가 없다"라고 할 때처럼 주로 논리적인 걸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의 부조리"라고 할 때처럼 도덕적인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그런데 영어의 'absurd'는 주로 논리적인 것(모순)에 해당되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실존철학에서의 'absurd'도 그것에서 파생된 것이다.
'부조리'란 번역이 좀 안 맞다고 느껴진 건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