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 2019 (1)

idlemoon 2019. 10. 11. 00:42

Portrait of a Lady on Fire
이번에 본 것 중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영화. 대사들이 참 좋다. 시대물임에도 제작비가 별로 안 들었을 것 같다. 두어 장면 빼면 등장인물이 몇 명 안 되고 장소도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시종 긴장감을 유지한다. 마지막에 오케스트라 공연장에서 (무대쪽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나오는 비발디의 '여름'이 압권이다. (집에서 보면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앞으로 그 끝부분을 들을 때마다 이 영화가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둘의 관계를 오르페우스 이야기에 빗대었는데, 에우리디체가 오르페우스에게 "돌아 봐요"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냥 '기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다는 뜻이겠다.

The Red Snowball Tree
1973년 러시아 영화. 최근에 '디지털 복원'이 된 모양이다. 주인공 캐릭터가 일본 영화 <남자는 괴로워>(야마다 요지)의 주인공 토라를 떠올리게 한다. 망나니 같이 행동하지만 본성은 나쁘지 않은 그런 남자. 러시아판이 더 어둡긴 하지만.

White Lie
사전에 white lie는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고 나오지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거짓말은 '선의'의 것도 아니다.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하여 후원금을 받아챙겼으니 말이다. 어쨌든 영화가 전혀 심심하지 않다. 가끔 지나치게 스릴러 장르를 따르려고 한 게 좀 거슬리긴 하지만, 캐나다 영화니까 - 미국이 아니니까 - 그나마 그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Where We Belong
태국 10대 후반 소녀들의 성장 이야기. 약간은 상투적으로 여겨지는 부분들이 없지 않지만 아주 잘 만들었다. 이번 부산에서 특히 느낀 것은 영화 만들기가 세계적으로 평준화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근데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불만은 주인공(수)이 너무 동남아스럽지 않게 생겼다는 것이다. 첫 숏에 나올 때 난 한국애인 줄 알았다. "동남아스럽다"가 인종차별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말은 주변에 보이는 그곳 사람들과는 너무 다른 느낌을 내게 주었다는 것이다. 영화 보고 나서 알게 된 건데 주인공들이 유명한 아이돌 그룹이란다.

Detention
초반에는 "내가 왜 이런 걸 보러 왔지" 후회했는데 - 보통의 공포영화인 줄 알았다 -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달라졌다. 마지막엔 감동도 있었다. 메인 스토리에 공포영화 같은 환상 장면을 섞은 게 특이하다. 60년대 대만을 끔찍한 독재국가로 묘사하고 있는데, 글쎄 장제스가 철권 통치를 한 건 맞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정치적인 게 이 영화의 주된 요소였다면 아마 끝까지 후회했을지 모른다. 주인공 소녀의 사랑으로 비롯된 작은 잘못이 큰 비극을 낳는 이야기가 오히려 이 영화의 골격이다.

The Witness
1969년 헝가리 영화. 어떻게 공산국가에서 이렇게 체제 비판적인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지? 제작년도를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끝나고 나서 다시 확인했다. 그러면서 10여 년 동안 상영 금지 되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소련 체제가 무너지기 10년 전이다... 지금 IMDB를 찾아 보니 처음 공개된 게 1981년 칸영화제인 모양이다. (헝가리 국내에서 처음 상영된 건 언제인지 모르겠다.) IMDB에 어떤 사람이 소개한 것에 따르면 이 영화는 "공산주의에 대한 최고의 풍자"로 알려져 있단다.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I Lost My Body
아주 마음에 든 애니메이션 영화. 초반에는 스토리를 이해하기 힘들다. 손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게 자신의 몸(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주인공 나우펠)을 찾아다니는 거라는 걸 잘 알 수 없다. 이건 이 영화의 약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손의 모험 장면과 교차로, 사고로 손을 잃기까지의 나우펠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손에 꼽을 만한 아름다운 장면이 이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이 영화에 불만이 없지는 않다. '손'의 의미가 너무 모호하다. 보통 상황에서 "I lost my body"라고 말하면 머리만 남았거나 아니면 신체가 전혀 없이 영혼만 남은 걸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제목에서 'I'는 분명 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건 어떤 은유인 듯한데 그게 뭔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다.

Book-Paper-Scissors
기쿠치 노부유키라는 일본의 북 디자이너에 대한 다큐멘터리. 일본인들의 장인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건 그걸 직접 보여준다.

Marriage Story
이 영화 전까지는 다들 좋았다. (본 순서대로 쓰고 있다.) 올해는 운이 좋나, 내가 나이가 들면서 쉽게 감동하게 되었나 등의 생각을 했다. 행복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의 바다'에서 유영하다가 갑자기 육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완전 식상했다. 넷플릭스 영화에서 뭘 기대하냐 싶었다. 뭐, 나만의 반응일 수 있다. 주위 관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좋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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