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

idlemoon 2021. 2. 9. 01:50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었다니! 최고의 한국영화다!
보는 동안의 반응은 그랬다. 깜짝깜짝 놀랐다. 냉정을 찾은 다음에는 많이 누그러졌지만 말이다.

나의 표현력으로 이 영화의 특이함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대사를 옮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한두 군데 예를 들겠다. (주인공 아로운은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들어가 있고, 히데꼬라는 일본 여자의 사랑을 받는다.)

난 일본이 미우니까!
전 일본 아니에요
히데꼬라는 여자예요
여자는 남자에 따라 성이 변하고
국적까지 변하는 걸 아세요?
결혼은 친척끼리 안 해요

빵 터진 장면 중의 하나다. 적어도 피식민지 국민의 입장에서는 무거운 상황인데 여자의 대사가 매우 가볍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에게 인종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생물학적 거리가 멀수록 좋다(즉 "결혼은 친척끼리 안 한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치사회적 현실을 너무 무시하는 건가? 고차원적 농담인가? 썰렁한 개그인가? 이런 해석하기 힘든 '가벼움'이 영화 전체에 있다. 다음은 헌병대에 끌려간 장면.

헌병님! 아로운 님은 죄가 없어요
손목을 잡은 건 나니까요
키스도?

그 이상의 것은?
그건 앞으로 생길 문제예요
아로운, 너 이 여자를 어떻게 했기에
이 꼴이냐? 에?
한번 키스의 기술을 보자

"그건 앞으로 생길 문제예요"라니!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1961년 영화인데! 게다가 키스를 해 보란다!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키스를 한다. 여자가 불을 꺼 달라고 해서 불도 끄고.

난 김기영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뽑은 한국영화 100편에 그의 영화가 4편 있지만 개인적으로 <하녀>(1960) 외엔 다 빼고 싶다. <현해탄...>은 내가 본 그의 영화들과 너무나 다르다. 각본을 쓴 한운사의 영화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것 외 그가 쓴 영화를 두 편 봤는데 그 또한 너무 다르다.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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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경희'라는 여자가 찾아와 만나는 부분이 통채로 소리가 없어 답답할 겁니다. 다행히 서점에 시나리오가 있었습니다. 전체를 다 올릴 수는 없고 한 페이지만 링크합니다. 여기 ('수자'가 히데꼬입니다. 시나리오와 영화가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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