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순수한 모순?

idlemoon 2009. 3. 8. 11:30

6년 전에 학과 홈에 올린 글. 약간 수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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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자신이 쓴 묘비명이라고 하죠.

Rose, oh reiner Widerspruch,    Rose, oh pure contradiction,
Lust,                                       Joy,
Niemandes Schlaf zu sein        of being No-one’s sleep
unter soviel                             under so many
Lidern.                                    lids.
                                             (tr. Stephen Mitchell)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토록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 싶은 마음이여.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허다한 눈꺼풀 아래의
그 누구의 잠도 되지 않는 기쁨이여.


약간 다른 버전도 있는데.. 하여튼 왜 장미가 모순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좀 찾아 봤습니다. 이해의 핵심은 "lid"가 장미의 꽃잎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참조한 그 글이 전적으로 옳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나 자신도 lid가 잎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고,
그 외 다른 방향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꽃잎을 눈꺼풀(eyelid)에 비유한 것입니다.
꽃잎=눈꺼풀이 그렇게 많으니 잠이 잘 오거나, 잠을 자고 싶겠죠.
그렇지만 한편 no-one's sleep인 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장미가 "누구의 잠도 아니다(no-one's sleep)"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일까?
혹시 "누구의 잠도 초래하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누구도 졸리게 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고, 그래서 기쁨(joy)인 것입니다.

그 많은 눈꺼풀로 자신을 덮어 버리고 평화롭게 살고 (또는 죽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기쁘니 모순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묘비명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상기하면 더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W.H. Auden이 릴케를 "The Santa Claus of loneliness"라고 했듯이
고독이 그의 시들의 주된 주제였다는 걸 생각하면,
"잠을 자고 싶다"라는 것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으로서의 기쁨이 있으니 모순인 것이죠.

다른 英驛을 보면 "joy of being"대신에 "desire to be"로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사랑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받고 싶은 욕망"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모순"이 더 강한 느낌입니다.
"눈꺼풀을 내리고" 싶은 욕망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이 바로 대립이 되니까요.

끝으로..
"순수한 모순"이라는 번역에 대해 불만이 있습니다.
영어의 "pure"는 좋은 뉘앙스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중성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독어는 잘 모르겠지만...)
가령 "pure devil"이라는 영어 표현을 보면 "순전히 악마", "완전한 악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순수한 악마"라고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착하고 순진한 "악마"로 해석되지 않을까요?
"pure contradiction"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詩에서는 언어의 사용이 변칙적일 수 있기 때문에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이것이 일상의 표현이라면 "순전한 모순" 정도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번역을 해 보면,

장미여, 오 순전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니고픈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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