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랑 호랑이가 함께 바다에서 표류한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원작이 있다지만 어쨌든)
참신한 것 같다. 바다에서의 이미지들도 심심치 않다. CG로 만든 호랑이도 굉장히 사실적
이다. 진짜 호랑이면 저렇게 연기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않았다면 CG라는 것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다.
하지만 영화는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바다에서 여러 번 나오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
바다 표면이 거울처럼 하늘을 반사한다든지, 물속 시점에서 배와 밤하늘이 보이는 장면
같은 것들은 - 물론 예쁘긴 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신의 섭리를
느껴라는 건가. 사람과 호랑이의 공존이 그렇게 환상적으로 아름답다는 건가.
그런 장면들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다르다. 가령 노을이라면
우리가 실제로도 보는 것이고, 영화에서 예쁘게 그려 넣을 수도 있지만 사실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 말한 장면들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판타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의미 부여를 강요한다는 말이다.
호랑이와의 관계도 뭔가 좀 애매하다. 일부 평자는 호랑이를 감상적으로, 혹은 의인화하여
묘사하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반전)을 생각해봤을 때, 호랑이와의 시퀀스
전체를 판타지로 간주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는 사실주의와 판타지 사이에서 마음을
못 정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227일(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그렇단다) 동안의 고난 - 굶주림, 외로움,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들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한 며칠 남태평양에서 신나는 모험을 하고 온 듯하다.
바다 시퀀스 전체를 판타지로 본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말했
듯이 호랑이와의 관계가 너무 밋밋하다.
초반 프롤로그에 묘사된 주인공의 특성들 - 3대 종교를 믿는다는지 숫자 파이의 소숫점
이하를 수천 개 외운다든지 하는 것들 - 이 왜 나왔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특성
덕분에 그가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특히 여러 가지 종교를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건 조금 황당하다. 한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나아가서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유태교의) 신비주의를 공부한다. 수천 년간의 종파 분쟁이 하나의 미소와
경건한 목소리로 해결될 수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