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1

스파이의 아내

냉전도 끝난,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스노우든 같은 사람이 국가기밀을 빼내는 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 시절에 순전히 양심 때문에 국가기밀을 빼내 서방에 알린다? 글쎄, 난 그런 있기 힘든 이야기는 실화여야 한다고 본다. 영화는 실화인 것처럼 진행된다. 관동군의 만행은 역사적 사실이고, 실제 기록 필름도 사용되었다. 끝에 주인공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자막으로 알려준다. 그러나 내가 찾아 본 바로는 실화에 바탕을 둔 게 아닌 것 같다. 실화가 아니라면 이런 영화를 왜 만들까?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스릴러를 만들 소재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 당시 이런 양심적인 일본인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희망을 표현한 건가? 그 당시에는 없었지만 이제는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역사..

영화 2021.03.29

All but human

영화 (2010)에 나오는 대사인데 한글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 궁금했다. 극장 상영본과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네이버 영화에서 다운 받아 보니 짐작대로 오역이었다. ('헤일셤'은 영화 초반에 나오는, 아이들을 수용했던 학교 이름이다.) You have to understand, 너희들은 알아야 해 Hailsham was the last place to consider the ethics of donation. 헤일셤은 (장기)기증의 윤리를 고려했던 마지막 장소였어 We used your art to show what you were capable of. 우리는 너희의 미술작품으로 너희의 능력을 보여주려고 했어 To show that donor children are all but human. 기증(용) ..

영화 2021.02.16

현해탄은 알고 있다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었다니! 최고의 한국영화다! 보는 동안의 반응은 그랬다. 깜짝깜짝 놀랐다. 냉정을 찾은 다음에는 많이 누그러졌지만 말이다. 나의 표현력으로 이 영화의 특이함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대사를 옮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한두 군데 예를 들겠다. (주인공 아로운은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들어가 있고, 히데꼬라는 일본 여자의 사랑을 받는다.) 난 일본이 미우니까! 전 일본 아니에요 히데꼬라는 여자예요 여자는 남자에 따라 성이 변하고 국적까지 변하는 걸 아세요? 결혼은 친척끼리 안 해요 빵 터진 장면 중의 하나다. 적어도 피식민지 국민의 입장에서는 무거운 상황인데 여자의 대사가 매우 가볍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에게 인종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생물학적 거리..

영화 2021.02.09

소나기

영화가 후반에 조금 처지는 게 아쉽지만 하나의 작은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잘 알려진 황순원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원작과 달리 소년 소녀의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사실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가능하겠다. 그래도 충분히 귀엽게 봐 줄 만하다. 고영남, 1978년. 위 프레임에서도 보듯이 색들이 매우 진하다(채도가 높다). 아마 필름 현상 과정에서 그렇게 한 것 같다. 필터도 많이 썼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구도, 예를 들어 앞에 꽃 같은 걸 걸쳐서 찍는 것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영화의 현실적이지 않은 면들을 커버하는 것 같다. 요즘 옛날 한국영화들을 보고 있는데, 시쳇말로 '힐링' 효과가 있는 듯하다. -----------------------------------------------..

영화 2021.01.23

초우(草雨)

One failure on / Top of another 영어 제목이 "Early Rain"이지만 제목의 '초'는 풀 '초'이다. 초우가 무슨 뜻일까. 사전에 안 나온다. 그냥, 풀에 내리는 비? 마음에 든 대사(독백) 하나: 소나무 사이를 이백 번이나 돌고 냇물에 돌을 백 개를 던져도 기다리는 사람은 오시지 않고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후반에 옛 여자친구한테 보복을 당하는 설정이 상당히 모던하다. 정진우 감독 1966년. -------------------------------- 주제가로 사용된 노래 제목이 '초우'군요. 박춘석 작사 작곡, 패티김 노래(그녀를 스타로 만든 노래다). 창피하다. 근데 가사를 봐도 초우의 의미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영화 2020.11.06

Tenet

액션 장면들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스토리가 워낙 허접해서 거론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배경에 마치 정당한 과학이 있는 것처럼 쓴 글들이 포털사이트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영국의 한 물리학 교수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을 조금 인용하겠다. "난 좋은 SF영화를 좋아한다. 좋은 액션 영화도 좋아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영화는 공상과학을 핑계로 좀 지나치게 액션과 장면들을 설정했다. 영리하려고 애쓰지만 영리하지 않다. 공상과학 영화이니 모든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할 필요가 없다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좀 심했다 - 플롯이 말이 되지 않는다... 같은 이전 영화들보다 [현실과의] 갭이 더 크다. 물리학적 근거가 훨씬 적다. 과학 전문용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그 용어들..

영화 2020.10.01

Papusza

2013년 폴란드 영화로서, 최초의 집시 시인이라는 '파푸샤'의 인생을 담았다. 파푸샤(인형이라는 뜻)는 원래의 집시 이름이고 Bronislawa Wajs라는 폴란드 이름도 가지고 있다. 위 장면은 자신의 시(노래 가사)가 처음으로 출판되어 고료를 전해 받는 상황이다. "그것(시)들이 어떻게 내 것인가요? 그들 내키는 대로 왔다가 가는 건데."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 전문적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 할 수 있는 말이라고도 하겠지만, 예술 작품을 창작자의 소유로 생각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에게 이 사고방식은 매우 신선했다. 그녀는 뒤에 이런 말도 한다: (약간 웃으며) "날 시인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자만심으로 죽거나 비탄으로 죽을 거예요." (비탄은 아마도 능력이 욕심을 못 따라가기 때문.) 위 사..

영화 2020.07.04

하나가타미

(1977)로 잘 알려진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2017년 영화. 영화가 좀 어렵지만 그냥 분위기만으로도 좋다. IMDB 사이트에서 본 표현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전쟁의 혼돈에 포위 당한 젊음의 순수함"을 담았다. 상당 부분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 - 세부적인 건 아니더라도 감정적인 면에서 - 인 듯하다. 영화 마지막에 늙은 주인공이 나오는데 배경에 '오바야시'라는 이름이 적힌 감독 의자가 한 번 보인다. 제목은 꽃바구니라는 뜻이고, 단 카즈오라는 일본 작가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카즈오는 다자이 오사무의 친구였다고 하며, 오사무는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들의 선생으로 나온다.) 영화는 그 소설 내용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영감을 받은 것이겠다. 영화에는 카즈오의 시 하나가 자주 인용된다. ゆきずりの まぼ..

영화 2020.03.05

부산 2019 (2)

Sorry We Missed You 켄 로치 영화. 이번엔 택배원과 그 가족 이야기다. The Cordillera of Dreams 를 만든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새 다큐멘터리. 칸에서 '특별상'을 받아서 뭔가 있나 했는데, 없다. Beware of Children 13살 여자애가 학교 운동장에서 남자애를 밀쳐 사망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자애 아버지는 노동당 인사이고 남자애 아버지는 우익 정치인이다. 학교 교장은 진보적인데 그 남자애 아버지와 밀애하고 있다(불륜은 아니다). 그 교장의 남동생은 동성애자이며 그 사고 순간에 현장에 있었어야 했던 교사다. 영화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생각하게 한다. 뻔한 양비론이나 양시론이 아니다. 만든 사람의 생각의 깊이가 느껴진다. 영어 제목 "Bewar..

영화 2019.10.12

부산 2019 (1)

Portrait of a Lady on Fire 이번에 본 것 중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영화. 대사들이 참 좋다. 시대물임에도 제작비가 별로 안 들었을 것 같다. 두어 장면 빼면 등장인물이 몇 명 안 되고 장소도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시종 긴장감을 유지한다. 마지막에 오케스트라 공연장에서 (무대쪽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나오는 비발디의 '여름'이 압권이다. (집에서 보면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 앞으로 그 끝부분을 들을 때마다 이 영화가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둘의 관계를 오르페우스 이야기에 빗대었는데, 에우리디체가 오르페우스에게 "돌아 봐요"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냥 '기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다는 뜻이겠다. The Red Snowball Tree 1973년 러시아 영화. 최..

영화 2019.10.11